인물 파일 번호 IJM-0028
분류: 역사 아카이브
토머스 에디슨
Thomas Edison
발명가

제1절 -- 인물 개요
| 이름 | 토머스 에디슨 |
|---|---|
| 영문명 | Thomas Edison |
| 국적 | 미국 |
| 생몰년 | 1847–1931 |
| 성별 | 남성 |
| 세기 | 19세기 |
| 분야 | 과학 |
| 직함 | 발명가 |
제2절 -- 경력
1847년 미국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일곱 자녀의 막내로 태어난 토머스 에디슨은, 끊임없는 질문 공세와 엉뚱한 실험으로 스승을 지치게 해 초등학교를 단 3개월 만에 그만두어야 했다.전직 교사였던 어머니 낸시가 직접 집에서 그를 가르쳤고, 지하실은 곧 소년의 화학 실험실이 되었다.열두 살 무렵 어릴 적부터 약해진 청력이 본격적으로 나빠졌지만, 그는 오히려 소음을 차단해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전환점은 열다섯 살에 기차역 플랫폼에서 달려오는 열차에 뛰어들어 역장 아들을 구한 일이었다.감사의 뜻으로 모스 전신기 조작법을 배우게 된 그는 순회 전신수로 전국을 돌며 실무와 기계를 익혔다.1869년 뉴욕으로 건너가 주가 표시기를 개량해 받은 4만 달러를 자본 삼아 뉴저지주 뉴어크에 공장을 차렸고, 1876년 멘로파크에 세계 최초의 「발명 공장」으로 불리는 연구소를 세운 것이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축음기로 세상을 놀라게 한 데 이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879년 장시간 타는 탄소 필라멘트 백열전구를 완성했다.이어 1882년 뉴욕 펄스트리트에 세계 최초의 상용 중앙발전소를 세워 전기 조명의 시대를 열었고, 전류 전쟁에서는 자신의 직류 방식이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의 교류에 패했지만, 곧 영화 촬영기 키네토스코프와 알칼리 축전지로 다시 새로운 산업을 창출했다.
평생 특허 1,093개를 출원하며 「발명왕」이라 불린 그는 1931년 뉴저지 웨스트오렌지의 자택에서 여든넷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장례일 저녁, 미국 전역은 1분간 불을 끄고 그의 빛을 기렸다.
제3절 -- 연표
제4절 -- 명언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땀이다.”
“나는 실패한 적이 없다. 안 되는 방법 1만 가지를 발견했을 뿐이다.”
제5절 -- 에피소드
[A]반쯤 들리지 않는 발명가
에디슨은 청력에 심각한 장애가 있었지만 오히려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소음 속에서도 사색과 실험에 몰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6절 -- 영향과 유산
에디슨의 발명은 산업 전체를 창출하고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혁했다. 실용적인 백열전구는 전기 조명을 보편화시켰고, 축음기는 녹음 음악 산업을 탄생시켰으며, 영화 촬영기는 영화 산업을 열었다. 멘로파크 연구소는 오늘날까지 기업들이 따르는 조직적 산업 연구의 모델을 확립했다.
제7절 -- 대표작·주요 업적
- [01]실용적 백열전구 (1879)
- [02]축음기 (1877)
- [03]영화 촬영기 / 키네토스코프 (1891)
- [04]세계 최초 상용 발전소 펄스트리트 발전소 (1882)
- [05]알칼리 축전지 (1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