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파일 번호 IJM-0041
분류: 역사 아카이브
측천무후
Wu Zetian
황제

제1절 -- 인물 개요
| 이름 | 측천무후 |
|---|---|
| 영문명 | Wu Zetian |
| 국적 | 중국 |
| 생몰년 | 624–705 |
| 성별 | 여성 |
| 세기 | 6-10세기 |
| 분야 | 정치 |
| 직함 | 황제 |
제2절 -- 경력
624년 당나라 이주(현재 쓰촨성 광위안)에서 목재 상인 출신의 공부상서 무사확의 둘째 딸로 태어난 무조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담대한 성격에 시문과 서예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열네 살 되던 637년, 그 미모와 기품이 궁에 알려져 당 태종의 후궁인 재인(才人)으로 입궁해 「무미낭」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이 첫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총애를 크게 얻지 못한 채 649년 태종이 붕어하자 관례에 따라 감업사에서 여승이 되어 머리를 깎아야 했다.반전은 태자 시절부터 그녀에게 마음을 두었던 새 황제 고종이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면서 찾아왔다.소숙비, 왕황후와의 숨 막히는 궁중 암투를 거쳐 655년 마침내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병약한 고종을 대신해 「이성(二聖)」으로 불리며 실질적 통치에 나섰다.
두 번째 전환점은 683년 고종의 죽음 이후였다.친아들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폐위·옹립하며 섭정을 이어가던 그녀는, 690년 마침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해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정식 여제가 되었다.재위 기간 그녀는 과거제를 확대해 신분 낮은 인재를 대거 등용하고, 전시(殿試)와 무거(武擧)를 새로 도입했으며, 적인걸 같은 명재상을 기용해 국정을 안정시켰다.
불교를 적극 후원해 룽먼 석굴의 봉선사 대불을 조성하고, 자신의 이름에 쓸 「조(曌)」를 비롯한 새 한자들을 만들어 썼다.그러나 말년에는 장씨 형제를 총애해 정사를 어지럽혔고, 705년 신룡정변으로 퇴위를 강요받아 같은 해 81세로 세상을 떠났다.섬서성 건릉의 무덤 앞에 글자 한 자 없는 「무자비」를 남긴 채, 공과의 판단을 후세에 맡겼다.
제3절 -- 연표
제5절 -- 에피소드
[A]무자비의 천고의 수수께끼
측천무후 사후, 그녀의 무덤 앞에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비석이 세워졌다. 자신의 공덕이 너무 커서 글로 표현할 수 없다고 여겼다는 설과, 공과가 반반이라 후세의 평가에 맡겼다는 설이 있다. 이 무자비는 오늘날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제6절 -- 영향과 유산
측천무후는 자신의 이름으로 황제에 즉위한 유일한 여성으로 중국 역사상 궁극적인 성별 장벽을 깨뜨렸다. 과거 시험 제도를 확대하여 출신이 아닌 능력에 기반하여 관리를 선발함으로써 중국의 통치를 전문화했다. 그녀의 치세 동안 영토 확장, 경제 번영, 문화 융성이 이루어져 효과적인 통치가 성별을 초월함을 증명했다.
제7절 -- 대표작·주요 업적
- [01]무주 왕조 수립 (690)
- [02]과거 시험 제도 확대
- [03]불교 후원과 룽먼 석굴 건설
- [04]새로운 한자 창제
- [05]건릉의 무자비



